백사헌은 다른 조직에서 넘어온 스파이입니다. 백사헌이 받은 지령은 ‘조직에 잠입할 것’ 또한 ‘긴밀한 정보 전달을 우선하고 발각 시 자결을 불사할 것’이었지만⋯ 백사헌이 누군가요? 손익 계산이 빠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 목숨을 건사할 줄 알죠. 비록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희생이 필수불가결하더라도 말이에요. 백사헌은 스파이로서의 신분이 발각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함께 잠입했던 동료를 대신 넘기고 본인의 무고를 거짓 입증한 바 있습니다. 스파이 색출의 공을 인정받아 직급이 오른 건 덤이고요. 백사헌은 딱히 어느 조직에도 그다지 충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타고난 처세술과 알맞은 사회성으로 양쪽에게 밉보이지 않고 발을 걸치고 있지만. 수틀리면 어느 한쪽, 혹은 둘 다 버리고 도주할 생각이 만만이겠죠. 몸보다는 머리를 쓸 타입 같지만 총기류는 능숙하게 다루면 좋겠습니다. 이 바닥 생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화약 냄새가 손끝에 배여 있으며, 눈을 가린 안대 안쪽에 목숨과 맞바꾼 깊은 흉이 있는 백사헌은 그런 대로 이 직업이 적성에 맞습니다. 그런 백사헌에게 요즘은 답지 않게 고민이 있습니다. 부담스러운 상사가 친한 척을 한다는 거죠. 그것도 조직 내에서 알음알음 보스의 후계로 내정되어 있다고 소문이 도는 여자가요!

 서연재는 보스의 오른팔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무게감이 있는 이미지는 아닐 것 같아요. 오히려 가볍고 조직원들과 격 없이 굴면서 마냥 해맑은 구석이 있죠. 다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조직에서 길러졌고, 반항하거나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이 조직원들이 저지르는 폭력에 익숙해지고 조직의 사상에 동화되었습니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분명 있어요. 그러나 세뇌에 가깝게 학습이 되어 규율을 어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하여 서연재는 겉보기만큼은 경력이 길고 보스에게 충성을 바친 조직원입니다.

 떠도는 말 중에는 강한 자가 오래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말이 있지요. 뛰어난 전략가는 아니지만 행동력이 강하고, 사격 실력이 특출나지는 않아도 유난히 운이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라 하지 않던가요? 운 좋게 따낸 실적과 생존 경력이 합쳐진다면 우연은 이제 곧 필연입니다.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는 타입이기도 하여, 특유의 친화성으로 조직 내에서 꽤 따르는 사람이 있는 서연재는 그렇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 서연재에게 최근 스파이를 색출해 냈다고 이름 알려진 신입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똑똑하고 유능한 조직원은 좋지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듭니다. 그리고 서연재는 생각한 것이 표정으로 태도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지요. 

 

 

 

 Episode 1. 친해지길 바라!

 백사헌은 솔직히 서연재가 부담스럽지만, ‘직위나 경력에 비해 만만해 보인다⋯.’ 라고 생각했을 법합니다. 이렇게 된 거 옆에 있다가 떨어지는 정보라도 주워 먹을 심산으로 우선 고개를 숙였을 것 같아요. 조직 내 주요 인사가 관심을 가져 준다면 좋지. 극악무도하게 이용해 주겠어! 그러나 극악무도하게 기가 쪽 빨리는 쪽은 백사헌이었으니⋯. 서연재의 얼렁뚱땅 되는 대로 식의 문제 해결과 일단 몸으로 부딪히고 보자! 하는 행동력에 같이 다니며 지치는 쪽은 백사헌이었을 것 같아요. ‘아니 이게 왜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지 않았을까요.

 서연재가 한 번은 백사헌에게 안대를 쓴 이유에 대해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뻔하잖아요. 눈병이 1년 365일 나 있을 리도 없고, 우리 직종이 직종이니 가리고 있으면 어련히 다쳤나 보다 생각하고, 민감한 부분은 구태여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인데. 백사헌은 서연재의 질문을 두고 ‘괜한 괴롭힘’과 ‘관심 표현’ 중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겠지만⋯ 정작 서연재는 정말 순순하게 궁금했던 거라면 좋겠습니다. 반짝이는 서연재의 눈빛에 쉽게 물러나 줄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 시선을 굴리던 백사헌이 손으로 제 안대를 끌어내립니다.감긴 눈 위쪽으로 오래된 흉이 남아 있겠지요. 백사헌은 꿰뚫린 게 심장이 아니라 눈이라는 데에 얼추 안도하고 있지만, 서연재가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조금은 궁금했을 것 같아요. 예상을 못했다는 것처럼 깜짝 놀랄지, 괜한 걸 물었다고 사과라도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듯 집요하게 질문하려나? 그러나 모든 예상을 깨고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아프지는 않았어?” 라고 묻는 서연재, 그리고 짧게 멈칫하다가도 한 번 코웃음을 친 백사헌이 “바보예요? 눈 하나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힌 거지.” 라고 하지 않을까요. 다시 안대를 바르게 쓰는 백사헌의 머릿속엔 역시 이상한 여자라는 감상이 남습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백사헌의 태도가 허물없어져도 좋아요. 서연재가 더욱 만만해진 백사헌과, 그걸 허물없는 태도를 보고 ‘사헌이가 나한테 마음을 열어 줬나 봐!’ 라고 착각하는 서연재려나요.

 

 

 

 Episode 2. 아, 총 그렇게 쏘는 거 아닌데.

 총기 훈련장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 서연재와, 뒤에서 음료 캔 하나 들고 다소 지루한 얼굴로 관전 중인 백사헌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발포하는 총알마다 과녁 중앙에서 엇나가서 당황하는 서연재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입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데려온 거였는데 말이죠. “왜 이렇게 안 맞지?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야!” 오해하지 말라는 서연재를 보고 피곤한 한숨을 삼키는 백사헌입니다. “⋯자세가 틀렸어요.” 정말정말 간섭하고 싶지 않지만 눈앞에서 표가 나게 오답만 고르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기도 힘이 들죠. 서연재의 뒤로 가서 자세를 잡아 주는 백사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상냥하기보다는 건조한 손길, 하지만 짚어 주는 손의 방향만은 정확하게.

 

 백사헌: 팔은 조금 더 위쪽으로, 굽히지 말고⋯ 네, 그렇게요. 무식하게 과녁만 보고 아무렇게나 방아쇠 당기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요?

 서연재: 그렇게 하면 다 맞던데! 그럼 사헌이가 고쳐 줬으니 이제 맞아?

 백사헌: 안 맞으면 문제가 있는 거죠. 총기 문제든, 다루는 사람 문제든.

 서연재: 그래? 어, 10점! 역시 우리 사헌이가 최고네~.

 백사헌: 하⋯ 고마우면 점심은 네가 사요.

 

 이런 대화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밥은 처음부터 본인이 살 거였다고 말하는 서연재는 덤으로요.

 

 

 

 Episode 3. 나는 사실 오래 전부터⋯.

 백사헌의 포지션이 스파이라면, 역시 꼬리가 밟히는 장면은 정석 클리셰가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이도 아닌 서연재에게 아주 우연히 들켰으면 좋겠습니다. 만만하게 보고 방심하던 서연재에게 같이 붙어 지낸 시간 만큼 경계심이 옅어진 탓에⋯ 백사헌의 조직과 접선 현장을 들켰거나 내통 정황이 서연재의 손에 들어갔거나 해서요. 서연재가 아무리 평소에는 좀 맹한 구석이 있는 선임이라고 해도, 다른 조직의 끄나풀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백사헌. 다급히 즉석에서 지어낸 변명을 주워섬기는데요. 서연재가 아무리 바보라도 눈에 뻔히 보이는 정황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 이쯤에서 백사헌이 스파이라는 것쯤은 알아차렸지만⋯ 서연재가 느끼는 감정은 배신감이나 분노가 아닙니다. 서연재는 태연한 얼굴로 눈에 뻔히 보이는 정황을 덮어 줍니다.

 

 백사헌: 어째서요?

 서연재: 이건 비밀인데!

 백사헌: ⋯뭔데요?

 서연재: 나는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잘못된 우리 조직을 무너뜨려 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어. 그러니까 사헌이를 응원할래.

 백사헌: 그 과정에서 네가 죽어도요?

 서연재: 내가 죽어도.

 

 이건 정말이지⋯ 이상합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물러도 되는 걸까요? 서연재가 하는 말은 이상한 말은 정말 진실일까요. 아니면 제게 관심이 있어 사랑에 눈이 멀기라도 한 걸까요? 목이 달아나는 최악은 면했지만, 헤실거리는 서연재를 보며 끝도 없이 기분이 나빠지는 백사헌입니다.

 

 

 

산산 @sansan_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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